"비움과 채움(요 6: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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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요 6 : 1 - 21
제목 : 비움과 채움
그리스 신화에는 에리직톤이라는 아주 욕심많은 한 사람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사람은 자신의 농지를 확장하기위해 신성한 숲에 있는 큰 나무를 종들에게 베어 없애라고 시킵니다. 하지만 종들은 신의 저주가 두려워 감히 나무를 베지 못합니다. 그러자 에리직톤은 신을 경멸하면서 스스로 도끼를 들고 그 나무를 넘어뜨립니다. 여신 데메테르는 이 오만한 에리직톤에게 ‘굶주림’이라는 벌을 내렸습니다. 이후 에리직톤은 늘 배가 고팠고, 아무리 먹어도 만족할 수 없게 됩니다. 그는 가진 재산을 다 팔아 음식을 사먹었고, 나중에는 사랑하는 딸까지도 종으로 팔았습니다. 결국 그는 자기 팔다리까지 다 먹어치운 후에야 죽음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문학 평론가이기도한 김기석 목사님은 에리직톤의 이야기를 통해 오늘 우리가 느끼고 있는 '허기증' 혹은 ‘결핍감'의 이유가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고 진단을 합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존재자들로 속을 채우려는 인생들의 허망한 노력을 에리직톤의 이야기가 절묘하게 들려주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필 말씀은 오병이어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모두에 기록될 만큼 중요한 사건입니다. 오병이어 사건이 무엇인가요? 주님께서 수많은 사람들의 굶주림이라는 결핍을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
생각해 봅시다. 결핍이 무엇인가요? 어떤 이에게는 육신적인 배고픔일 것이고, 어떤 이에게는 채워지지 않는 정신적인 결핍을 말할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이는 영적인 불안과 낙심, 공포와 같은 결핍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결핍의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인생이 있던가요? 이 땅의 모든 인생은 누구도 결핍에서 자유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오병이어 사건을 통해 말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이 인생의 허기짐이라는 문제를 주님께서 해결하여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말씀을 묵상하면서 단순히 굶주림으로만 생각하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그 날에 모인 사람들은 5천명이 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한 사람 한 사람을 생각한다면, 오병이어 사건은 5천명이 넘는 각각의 결핍을 주님께서 해결해 주실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말씀을 함께 나누는 가운데 결핍에 대처하는 우리의 모습과 우리 주님이 누구인지를 다시금 확인하며 고백하는 시간되기를 소망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모여들었습니다. 주님은 평소와 같이 그들에게 말씀을 전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말씀이 끝나자 문제가 보입니다. 배고픔입니다. 먹을 양식도 없고, 양식을 구할 곳도 없고, 돈도 없습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해결하겠습니까?
아마도 가장 쉬운 방법은 그들 모두를 각자의 집으로 돌려보내는 것일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도 이제 끝났으니,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여도 문제될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5절에서는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그들을 보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주님께서 보신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마가복음 6:34절은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보기에는 그들은 목자 없는 양같이 불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그들을 이끌어줄 목자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누구도 그들의 영혼을 돌보지 않았더라는 것이지요. 그런 불쌍한 이들에게 주님께서는 말씀을 주시면서 가르치셨습니다. 주님이 보신 것은 그들의 영적인 허기였습니다.
그렇다면 당시에 주님앞에 모인 사람들은 어떠했을까요? 도대체 어떤 기대를 가지고 예수님에게 사람들은 모여들었을까요? 그것은 메시아에 대한 기대 때문이었습니다.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오래 전에 약속하셨던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오실 메시아는 이스라엘 민족의 굶주린 배를 채우고 정치적인 자유를 주는 존재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이 기대했던 그러한 메시아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성경에서 약속한 메시아에 대하여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지요. 주님은 그들의 영적인 결핍을 보면서 어떻게 해서든지 채워주시려고 말씀을 주시는데, 이들은 예수님을 다르게 생각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4절 말씀을 보니 오병이어 사건의 배경이 되는 때가 유월절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가만히 문맥을 보면 이 내용이 없어도 흐름에는 전혀 지장이 없어 보입니다. 왜 요한은 유월절을 굳이 언급하였던 것일까요? 메시아에 대한 백성들의 기대와 맞물리기 때문이었습니다.
유월절은 애굽에서 400년 이상 종으로 살았다가 모세의 인도에 따라 해방을 얻었던 사건을 기념하는 절기가 유월절이었습니다. 그런 유월절에 기적을 행하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메시아를 떠올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과정이었을 것입니다.
백성들은 그런 예수님을 보면서 언젠가 메시아가 다시 한번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것이라는 가르침을 기억했을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메시아가 모세와 같이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줄 것이고, 온 민족이 메시아와 더불어 축제를 벌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중에 예수님이 유월절 즈음에 모세가 만나를 내린 것처럼 사람들에게 떡과 물고기를 먹이는 기적을 베푸시자, 사람들은 곧장 그가 바로 메시아라고 확신하였던 것입니다. 그런 그들이 예수님을 잡아 왕으로 삼으려 한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렇듯이 백성들은 어떤 기적에 대한 호기심이나 단순히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모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이 고대했던 메시아라는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 모인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과연 그들이 고대했던 메시아였습니까?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들은 분명 잘못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인지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였습니다. 게다가 그들에게 올바른 가르침을 주고, 제대로 인도해줄 지도자가 없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왜 그렇게나 영적으로 곤고한지 갈급함을 경험할 수 밖에 없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불쌍한 목자없는 양떼에 불과하였던 것입니다 .
그렇다면 예수님의 제자들은요? 그들은 예수님곁에 있으니까 제대로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빌립에게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빌립은 어떻게 대답합니까? 7절입니다. “7.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빌립은 예수님의 질문을 받자 계산을 합니다. 사람들을 먹이기 위해서는 200데나리온이 필요하다고 정확한 데이터를 제시합니다. 사실 이백 데나리온은 사실 노동자의 200일 동안의 임금입니다. 엄청난 금액이지요. 거기에 더해서 떡을 구할 곳이 없다라는 것을 이야기 합니다. 제대로된 현실인식이 아니겠습니까? 그만한 돈도 없고 구할 수도 없으니 괜히 헛수고 하지 말자라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불가능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것을 몰라서 빌립에게 물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6절입니다. “6.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 예수님께서는 빌립이 그렇게 계산할 줄을 먼저 아셨습니다. 그러한 그의 능력을 확인하시기 위함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질문의 핵심은 ‘어디에서’ 였습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원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그 숱한 불가능이었다라고 말하는 기적들을 고스란히 옆에서 보았던 빌립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빌립은 달랐어야지요. 왜 빌립을 시험하셨냐구요? 그러한 그의 믿음의 상태를 고스란히 드러내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빌립에게 기대했던 대답은 “당신입니다” “지난 번에 그렇게 하셨던 것과 같이 이번에도 동일하게 기적을 일으킬 것이라 믿습니다”라는 대답을 기다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빌립이 보여준 것은 그저 그의 조악한 믿음의 수준만을 드러냈을 뿐이었습니다. 주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런 중에 안드레가 어린 소년을 데려왔습니다. 9절입니다. “9.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안드레는 예수님에게 “여기 한 아이가 있습니다.”라고 말을 합니다. 예수님의 질문과 연결시켜 본다면, “어디에서”라고 예수님이 물었더니, 안드레는 “한 아이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는 것입니다.
32절을 보면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모세가 만나를 주었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안드레의 대답이 당시 백성들의 대답과 다른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만나는 누가 주신 것이었습니까? 하늘의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에게 하루도 빠짐없이 내려주셔서 그 백성들이 광야에서 살아남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후손이 되는 백성들은 하나님은 잊어버리고 모세를 이야기하고, 장차 오실 메시아는 모세와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지금 백성들이 고대하고 있던 메시아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또 하나의 모세를 고대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보는 방향이 잘못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안드레 역시도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도 믿지도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그저 물고기 2마리와 떡 5개를 가진 어린아이였습니다. 한 사람의 성인이 먹기에도 충분하지 않은 먹거리를 주님앞에 내어놓으면서 불가능을 이야기하였다는 것입니다.
빌립이나 안드레가 그러한 현실인식과 부정적인 것들만을 이야기할 수 밖에 없던 이유가 어디에 있었을까요? 그들 모두는 주님과 함께 하고 있었지만, 커다른 문제 앞에 가진 것이 없는 자신들의 능력없음이 보였습니다. 돈이 없다는 현실적인 장애가 보였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주님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니, 주님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절망하고 포기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주님을 제쳐놓으니, 그들앞에 놓여 있는 것들은 감당할 수 없는 어려운 현실에 대한 차고 넘치는 증거들이었습니다. 오천명, 만명, 이만명의 사람들이 보였습니다. 자신들의 빈 주머니가 보였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광야가 보였습니다. 보잘 것 없는 자신의 처지가 보였던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보니 절망할 수밖에 없는 것이겠지요. 도저히 희망을 가질 수 없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겠지요. “가능하겠어?” “기도한다고 되겠어” “이제 끝난거야”
이들이 누구입니까? 이들은 예수님과 함께 다니면서 수많은 기적의 현장을 목격했던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중 누구도 예수님께서 그 모든 기적의 주인공임을 기억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하셨던 주님께서 그 이상의 것을 또한 하실 수 있는 분이심을 상상할 수 있는 이들이 없더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볼 만한 믿음이 없었으니 영적인 상상력이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들의 모습이 참 낯설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 세상을 살아가면서 누구보다 더 면밀하게 현실을 파악하고 분석하면서 그에 맞게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정확한 현실인식과 판단에 기초한 결정이 언제나 옳은 것일까요?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절박한 문제들을 만날 수 있습니까? 이를테면 갑작스러운 질병과 죽음, 예기치 않은 사고, 경제적인 문제들 등, 우리가 전혀 상상하지도 못했던 변수들이 우리 인생길에 닥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계획했던 그런 황금빛 인생 여정이 아닌 때를 만날 수도 있습니다. 왜 우리 삶에 어려움이 닥치는지, 왜 감당할 수 없는 궁지로 우리를 몰아넣으시고도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시는지 이해할 수 없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고통의 이유를 짐작조차 하지 못하는 경우가 또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빌립이나 안드레와 같이 우리가 처한 어려움의 상황들을 따져보니 도저히 답이 없다고 두 손 두 발을 들어야 할 때에 분명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충분히 고민하고 갈등하면서 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해결해 보려고 애를 쓸 것입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좌절이며 절망이라고 말할 수 있는 때가 있더라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살펴도 출구가 보이지 않아요. 그 끝을 알 수 없는 구덩이 속으로 빠져들어가고 있는 듯한 느낌이 있는 때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때에 우리에게 주님은 물으십니다. “어디에서” 라는 질문을 던지시는 것이지요. 여러분은 어디에서 답을 찾으시겠습니까? 무엇으로 그 모든 삶의 절박한 문제들을 넘어서겠습니까? 6절에서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께서 빌립을 시험하시려고 물으셨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하나님이 우리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한계들을 두신 것은 이유가 있는 것이겠지요. 세상은 어디로 가야할지 대답해 줄 수 없지만, 주님은 당신을 보기를 원하십니다.
“시험하시려고 입니다”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묻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를 어떻게 보겠느냐라는 질문입니다. 문제에 대한 답이 이미 있음을 믿을 수 있느냐라는 질문입니다. 우리 주님이 하나님이심을 믿을 수 있느냐라는 질문인 것입니다. 믿음으로 주님에게 답이 있음을 고려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떠올리지 못하는 아둔한 인생들로 하여금 주님의 능력을 기억하고 알게 하기 위함이 아니겠느냐는 것이지요.
요한은 오병이어 사건을 표적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표적이 무엇인가요? 표적은 가리키는 바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이지요. 오병이어 사건을 통해 우리가 예수님이 누구인지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아야 할 예수님이 누구신가요?
35절입니다. “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배고픔에서 벗어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기적을 체험하는 것보다 더 놀라운 일이 있다구요.
예수님은 생명의 떡이라는 사실입니다. 백성들이 그렇게나 고대하였던 만나가 다시 내린다 할지라도, 그것은 영원한 생명의 근원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그 만나를 먹어도 백성들은 때가 되어 죽었습니다. 아무리 많은 기적들을 체험하고, 배고픔이 아니라 그 이상의 물질의 풍성함을 경험한다 하더라도 세상에서 우리는 부족하다고 더 많은 것이 필요하다고, 더 큰 자극이 필요하다고 우리는 말하는 존재라는 것이지요. 그렇기에 불안하지요. 그래서 또 계산하고 염려하고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주님보시기에 백성들이 불쌍한 이유가 어디에 있었겠습니까? 그들 모두는 채워지지 않는 영적인 결핍을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을 채우고 해결할 방법을 모르고 유리방황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어디로 가야할 지 모르는 인생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이 누구인지 몰랐다는 것이지요.
우리의 영적 배고픔과 목마름은 오직 주님께 나아갈 때 해결받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 나아가면 결코 배고프지 않고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합니다. 어떻게 생명의 떡이신 주님을 먹을 수 있을까요? 오는 것과 믿는 것입니다. 주님이 그러한 분이심을 알고 믿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오병이어라는 기적의 사건을 기록하면서 요한이 말하려고 하는 바가 무엇인가요? 먼저 우리 인생들은 결핍으로 가득한 불쌍한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둘러보고 따져 보아도 확인되는 것은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절망이고 좌절입니다.
그래서 주님께 나가야한다구요. 주님만이 우리의 갈한 심령과 깨어지고 부서지며 망가진 심령을 채우고 위로해 주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주님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은 우리 인생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오신 분입니다. 주님께 나아가지 않고는 살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도 물으십니다.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이 질문앞에 믿음으로 “주님입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오늘도 주님만이 전부입니다라고 믿으며 주님 나라를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되기를 축원합니다.